부마항쟁 희생자 고 유치준 추모제에서^^

2011. 10. 20. 04:01더불어 사는 세상/시민사회

 

 

 

 

 

 

 

 

 

 

 

 

 

 

 

 

 

 

 

 

 

 

 

 

 

 

 

 

 

 

 

 

 

 

 

 

 

 

 

 

 

 

 

 

 

 

 

 

 

 

 

 

 

 

 

 

 

 

 

 

 

 

 

 

 

 

 

 

 

 

 

 

 

 

 

 

 

 

 

 

 

 

 

건설노동자였던 유씨가 산호동 거리에서 머리가 깨진 채로 타살된 이후 32년만에 부마항쟁 피해자로 인정되고 뒤늦게서야 추모제를

 

 

 

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http://cafe.daum.net/buma1018, 회장 정성기)가 부마항쟁 32주년인 10월 18일 오후 4시 마산 삼각지공원에서 고 유치준 추모문화제를 엄숙하게 거행하였다. 항쟁 당시 건설노동자였던 유씨가 산호동 거리에서 머리가 깨진 채로 타살된 이후 32년만에 부마항쟁 피해자로 인정되고 뒤늦게서야 이날 추모제를 치른 것이다. 가슴을 에이는 슬픔 속에 진행된 추모제 내내 유족들, 항쟁 주역들, 종교인, 정치인, 문화예술인, 시민들은 모두 눈물을 쏟았고 흐느꼈다. 박정희 유신독재를 무너뜨린 1979년 10월 부마민주항쟁의 희생자 3인, 피해자 1500여명의 명예회복은 커녕 진상규명조차 이뤄지지 않았다. 현재 특별법 제정을 강력하게 요구하며 국회에 법안을 제출한 상태이지만 심의는 미뤄지고 있다.

 

만약 서울까지 부마항쟁이 번졌다면 박정희는 "발포하겠다"고 말했다는 고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육성 녹음테이프가 공개되었다. 가히 충격적인 발언이 아닐 수 없다. 10.26이 없었다면 얼마나 많은 사상자가 나왔을까를 생각하면 몸서리쳐진다. 마산의 10월 18일 낮 경남대 학생들에 의해 촉발된 시위가 밤이 되면서 시민, 노동자가 대거 참여하는 민중항쟁으로 급속히 확산되었다. 박정희 군사정권의 장기독재, YH사태 등 폭압정치에 분노한 마산시민들의 거대한 민주화투쟁이었다. 파출소, 시청, 방송사, 세무서 등이 주요 타격 대상이 되었다. 그때 경찰의 무장력과 진압수준은 미미한 상태였고 민중의 거센 분노를 막기엔 역부족이었다고 본다. 그날 자정 무렵 경찰병력 증원, 군인 투입이 시작되면서 진압방식은 강경일변도로 변했다. 아마 그때 유치준씨 등 3인이 사망한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고 유치준 추모제에서 내가 느낀 것은 자책감이었다. 32년만의 추모제라니...여태까지 마산은 무얼 하였더란 말인가? 허울좋은 민주성지 마산은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한다. 이명박 정부 들어 민생, 민주주의,남북관계가 파탄난 지경에 부마항쟁 특별법 제정을 기대하기는 무리다. 2012년 진보적 민주주의로의 정권교체가 되지 않는다면 대한민국의 미래는 더이상 없다고 생각한다. 부산, 마산의 민심은 격동하고 있으며 부마민주항쟁의 정신을 계승하는 일은 바로 정권교체이다. 역대 독재정권에 맞서 분연히 일어섰던 야당도시 마산의 명예를 되찾아야 할 때이다. 한 송이 국화꽃을 영전에 바치면서...그의 죽음을 헛되이 말자고 외치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