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없는 사람은 들어오지 마시고 이야기는 간단히 하시오,

2006. 2. 24. 10:27산행기/답사·산행·동문

일 없는 사람은 들어오지 마시고
이야기는 간단히 하시오,

달궁(이성근)
민족자주공조반전평화공조통일애국공조 12월

(1) 1930년 대, 종로구 화동<조선어학회> 사무실 2층 입구에는<일 없는 사람은 들어오지 마시고 이야기는 간단히 하시요>라는 글발이 붙어 있었다고 합니다. 조선말의 오랜 발전역사상 처음으로 우리가 우리 손으로 우리말사전을 편찬하는 사무실이었습니다. 리극로, 이중화, 한징, 정인승, 권덕규, 정태진, 권승욱 등 사전편찬위원들이 분초를 쪼개 쓰며, 서로 방해하지 말고 일에 열중하자는 의지입니다. 조선어학회 간사장으로서 물불을 가리지 않았던 리극로 선생의 불굴의 신념이 여기에 그대로 넘쳐 나고 있습니다.

<1930년 12월, 그 당시 학회의 간사장은 이극로였는데 독일 유학에서 돌아온 그는 어찌나 학회 일에 열성인지 <물불>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128쪽.....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당시 이극로는 조선어학회 대표자라 하여 독방에 갇혔고 남보다 심한 고문을 당했다. 151쪽> 이희승 선생은 (다시 태어나도 이길을)에서 물불 선생을 회상하고 있습니다.

나는 우리 글로 된 우리말 사전을 물려받았다는 것에 더 할 나위없는 긍지를 갖고 있습니다, 우리말은 우리 민족의 재보이며 우리 민족발전의 위력한 무기입니다. 짐승과는 달리 사람은 언어로써 살아갑니다. 우리에게 우리말 보 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일제의 엄혹한 탄압 속에서 조선어문학자들의 피어린 헌신으로 이룩한 우리 말글의 전통을 이어 가야지 잘라버릴 수는 없습니다. <겨레말큰사전>의 과제는 여기서부터 출발하여야 합니다. 조선어학회의 정신을 계승 발전시켜야 합니다.

이글은 첫째로 <겨레말 큰 사전편찬>사업이 분단되고 처음으로 <우리 민족끼리>의 민족대사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지혜와 힘을 모아야 할 조국통일위업인 만큼 우리의 관심을 불러일으키자는 것이며, 둘째로는 민족어를 수호하고 연구 발전시키는데 한생을 받치신 국어학자, 리극로 선생의 업적을 기려 생가를 우선<문화재>로 지정하여야 한다는데 있습니다. 집터 정도가 아니라 생가가 남아 있습니다.

2001년 12월 7일, 최현배선생의 생가를 울산광역시의 지방문화재로 지정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극로 선생의 생가는 문화재는 고사하고 기념표식비마저도 없습니다. 한글문화유적지로서 문화재로 지정하여야 합니다. 끝으로 이글은 <한글학회 김계곤 회장>,<한글문화연대 김영명 대표>,<국학연구소 이영재 이사장>,<남측공동편찬위원회 상임위원장 고은>,<독립기념관 김삼웅 관장> 등의 민족어 관련기구에 호소하는 간절한 글이기도 합니다.

2005년 <자주평화통일을 위한 815민족대축전>이 서울에서 열려, 8월 16일 오후 2시 30분에<겨레말 큰 사전>편찬을 위한 남북공동편찬사업 보고회의가 백범기념관에서 있었습니다. 이때 회의장에서 들은 말입니다. <일본을 준다 해도 서울을 준다 해도 우리 한글과 바꾸지 않겠습니다>라고 홍윤표 (남측편찬위원회 공동위원장)선생의 말에 나는 깊은 감동과 자극을 받았습니다. 또한 내가 감옥에 있을 당시 들은 말이 떠올랐습니다. <리극로 선생은 마산에서 배를린 대학까지 걸어가서 조선말을 연구하였다.>는 말이 지금도 가슴에 사무칩니다.

최근에 리극로 선생의 평전<북으로 간 한글운동가, 박용규 지음>도 읽었으며, 11월 17일 부산에서 아팩 반대투쟁을 마치고 18일 경남 의령군 지정면 부곡리, 리극로 선생의 생가를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11월 26일 천안 독립기념관에도 갔으며 <국학연구소>에서 리극로 선생의 자서전<苦鬪40年·>도 천만다행으로 구할 수 있었습니다. 언어문제를 민족문제로 보시고 애국의 한길로 사신 분이라는 것을 깊이 알게 되었습니다. 리극로 선생은 민족어의 문제를 민족자주성 실현의 문제로 보았습니다. 조국의 광복과 통일, 조선말글의 연구와 보급을 위해서 한생을 바치시었습니다.

제국주의자들의 사상문화적 침투, 특히 언어적 침투를 통하여 노리는 목적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합니까. 그것은 바로 나라의 자주권, 민족의 자주성을 무참히 유린함으로써 저들이 추구하는 세계지배를 손쉽게 달성하자는데 있습니다. 세계화의 본질은 바로 미제의 식민지화입니다. 일제도 <내선일체>, <동조동근>을 파렴치하게 떠벌리면서 <황민화>를 위하여 조선말을 못 쓰게 하고 일본말을 사용하도록 강요하는 시대였습니다. 우리말은 일제의 민족어말살정책으로 사라질 운명에 놓여 있었습니다.

일제의 가혹한 탄압 속에서 우리말을 연구하고 보급하는 투쟁은 민족해방을 위한 투쟁의 중요한 고리입니다. 조선말은 조선민족의 형성과정에서 그리고 우리민족의 자주적 발전에서 중요한 수단으로 되어왔습니다. 그분의 생애를 이러한 관점에서, 이 범위에서 간략히 소개하겠습니다. <고투 40년>, <북으로 간 한글학자>를 참고로 하였습니다. 이 책들을 읽어주기 바랍니다. 폭넓은 지식을 얻을 것입니다.

(2) <내가 자랄 때 내 집은 농업으로 겨우 살아가는 가난한 농가로서 약 20명의 식구가 한집에 있으니 사람이 귀하게 보이지 않았다.> <동리에서 공동으로 보는 대한매일신보를 힘써 읽었다. 이 신문이 나에게 세상소식을 전하게 되었으며 또 많은 충동을 주었다. 그 결과 가정을 떠나게 되었다. 처음에는 북으로 서울로...다음에는 남으로 마산항으로 도망을 첬다.... 양기탁, 박은식, 신채호 등의 구국 및 민중게몽의 논설은 민족의식을 키웠다.>이렇게 그의 자서전 <고투40년>에서 회상하고 있습니다.

1893년 8월 28일, 경남 의령군 지정면 두곡리에서 8남매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세 살에 어머니를 여의고 형수와 서모 밑에서 자랐으며 어려운 집안 형편으로 그에게 차려진 것은 호미와 낫, 지게였고 밤낮 농사일이었습니다. 1910년 8월, 18세, 일제가 조선을 완전히 강점되었다는 소식은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고 합니다. 몰래 가출을 하였습니다. 거리와 여관을 돌면서 은단을 팔며 마방에서 말 죽을 쑤는 등 힘겨운 고학으로 <마산창신학교>의 보통과와 고등과를 마쳤습니다.

20세에 만주로 가서 독립군을 양성하는 동창학교, 백산학교에서 교원생활하다 1916년 24세에 중국 상해 동제대학 예과에 입학하여, 28세에 동제대학을 졸업하고 1922년 4월 독일 배를린 대학 철학부 정치경제학과에 입학하였습니다. 1923년 10월 배를린대학 내에 조선어과를 창설하여 조선어 강사를 하였습니다. <그대 나라말은 어째서 이다지 철자법이 통일되지 못했는가? 사전이 없다니 참말인가>라는 핀잔에 가까운 외국인의 질문에 큰 수치와 충격을 받았습니다.(북으로...88쪽)

35세에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다음 영국 런던대학의 정치경제학부의 연구생으로 1학기 동안 연구하였고, 영국에 머물면서 아일랜드를 둘러보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자기 나라 말 대신에 영어를 공영어로 사용하고 간판과 도로의 표식을 비롯하여 모든 것이 영어로 표기된 것을 보고 <우리말과 글도 저런 신세가 되지 않겠는가>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그는 조국에 들어가면 우리말을 지키는 운동에 한평생을 바치자고 결심하였다고 합니다. 1928년 36세에 프랑스 파리대학 음성학 실험실에서 조선어 음성을 실험하였습니다.

1929년 1월 귀국하여 조선어연구회에 가입하고 10월 조선어사전편찬회를 조직하고 간사장이 되었습니다. 1929년 12월, 37세의 나이로 천도교회관에서 평안남도 지남포가 고향인 소학교선생과 결혼하여 3남 2녀를 두었습니다. 지금 그의 생가, 두곡리 마을에는 그의 직계후손이 없습니다.

1929년 10월, 각계인사 108명을 발기인으로 하여 <조선어사전편찬회>를 조직하여 책임자로 활동하였습니다. 맞춤법통일안과 사전에 올릴 표준어제정, 외래어표기법통일안 등을 직접 계획하여 불철주야 사업하였습니다. 주해가 완성된 약 16만으로 사전편찬이 완성 단계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일제는 조선어학회사건을 일으켜 사전편찬은 중단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1929년부터 13년간에 걸쳐 준비한 사전편찬원고가 <상고심재판증거물>로 일제에게 압수당했으며 많은 조선어학자들이 함흥형무소에 감금되었습니다.

1945년 9월 조선어학회 간사장으로 선출되었습니다. (참고로 간사장은 조선어학회의 규약에... 간사장은 본회를 대표고 각부를 통할하며 간사장과 간사는 총회에서 선거한다.) 1946년 7월 조선어학회 회장으로 추대되었으며, 당시 2개 언어의 사전은 있었지만 1 언어의 사전은 없었습니다. 5000년 역사에 무궁무진한 조선어, 뛰어난 문자를 갖고 있었지만 우리말사전은 없었습니다. 모든 것이 어렵고 힘든 조건에서 드디어 1947년 10월 <조선말큰사전> 첫째권이 발간되었습니다. 실로 우리 말사전의 탄생과정은 조선어학회간사장 리극로선생을 비롯한 많은 어문학자들의 애국애민의 헌신적 노력 없이는 불가능하였습니다.

리극로 선생은 미제와 이승만의 단독정부수립책동을 반대하여 <현 단계 좌우합작운동을 남북합작운동으로 지향할 것이며, 우리 민족은 하나이며 우리 조국도 하나이다. 우리 민족은 통일독립을 요구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1948년 4월 남북제정당연석회의에 참석하였습니다. 그 후 평양에 남아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조선어 및 조선문학연구소 소장,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 등 많은 사업을 하다 1978년 9월 13일 86세로 한생을 마치고 애국열사릉에 안장되어 있습니다. 비문에는 <조국전선 의장>이라고 표시되어 있습니다.

(3) <겨레말 큰 사전>편찬사업은 온 겨레의 조국통일 위업 실현의 역사적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민족어 교육을 받지 못했다. 일본어가 <국어>가 되고 조선어는 식민지 원주민의 언어로 전락되는 시기에 어린 시절을 맞게 되었습니다. 당시 친일매국노들은 <대동아건설>을 위해서는 일본어가 국제어로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마치 오늘 영어를 공용어로 하여야 한다고 하는 자들과 무엇이 다릅니까. 세계화의 본질은 미국화이며 그 수단이 영어입니다.

우리 말글이 살아남을 가능성은 갈수록 희박해지는 상황 속에서 우리말 연구보급은 바로 조선정신을 지키는 투쟁이었습니다. 나는 1945년 해방이 되자 조선어학회가 만든 <한글첫걸음>으로 우리 글자를 독학하여 거리의 벽보를 읽을 수 있었습니다. 참으로 배우기 쉬운 우리 글자였습니다. 오직 우리 겨레만이 우리 겨레말을 지키고 발전시켜 써 왔습니다.

또한 당시 나에게는 조선말을 조선말로 풀이한 사전은 없었습니다. 사전이란 말 자체도 몰랐습니다. 이 정도라면 식민지노예로, 황민화된 쪽발이로 꾸벅꾸벅 살아갈 수 밖에 없었슬 것입니다. 나의 머리는 한자말이나 쪽발이말, 꼬부랑말로 더럽혀져 왔고 지금도 오염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조국의 분단 현실은 나의 사상의식의 성격이나 수준, 그 내용을 근본적으로 뒤바꾸어 놓았습니다. 지난 시기 일본말이 쫓겨나듯 언젠가는 영어도 이곳에 제대로 있지는 못 할 것입니다. 오직 우리 말글을 우리가 챙기고 가꾸어 써야 합니다.

남쪽의 <표준어 대사전>, 북쪽의 <조선말 대사전>, 해외의 <조선말 사전>을 기초로 하여 겨레말큰사전을 만든다고 합니다. 사전에 올릴말 어휘는 30만개로 하되 기존사전에서 20만개를 올리고 문헌조사를 통해서 6만, 현장조사를 통해서 4만을 올리기로 하였습니다. 또한 60년이나 갈라진 우리 말 사전편찬을 위해서는 사전에 올일 말 선정이나 어휘조사작업, 단일 언어규범이 선결조건이며 필수적입니다. 그러나 <단일 언어규범>은 통일지향적인 언어규범이지 이 규범은 남과 북에서 사용하는 현행언어규범에 대하여 어떠한 구속력을 가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구동존이의 현실적이며 합리적 조치입니다.

또한 나라의 통일이나 어문의 통일이나 그 통일을 통한 민족자주의 실현은 1930년 그 날이나 21세기 오늘이나 그 역사적 과제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모든 것을 통일지향적으로 고찰하는 원칙인 <우리 민족끼리>의 이념에 충실하여야 합니다. 사전편찬사업 역시 이에 결정적으로 작용하는 것은 민족자주의식며 이 자주적 사상의식이 편찬사업의 발전 속도와 우리의 요구수준을 결정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따라서 우리 눈, 우리 머리, 우리의 론리로 세상을 보고 대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다시 한번 이 글의 뜻을 밝히고저 합니다. 오늘 우리 시대는 우리 민족끼리 화해하고 단합하여야 할 자주통일의 시대입니다. 리극로선생이 남북협상에 참가하였다가 그대로 평양에 머물었다 하여 알아서도 안되며 그 분의 행적이나 공적마저 매장하여 버리는 짓은 말아야 합니다. 우리말 사전편찬을 위해서 물불을 가리지 않고 헌신하였으며 조국광복과 통일을 위해서 애국애족의 한길로 한생을 마친 분입니다. 리극로선생의 출생지가 <두곡리 마을, 집터자리엿다>는 유적지 정도가 아니라, 리극로 선생의 생가로서 <그 친척이 살고 있으며, 마룻대에는 아직도 뚜렷하게 (을묘 단기 4248년 7월 15일...>라고 한문으로 씌어저 있읍니다. 우선 사적지로서 지정하여 우리말글 사랑과 애국의 교육교양의 장소로 세상에 널리 알리며 지방의 문화유산으로 긍지와 자부심을 갖게 하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